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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완전한 행복 독후감 및 줄거리. 정유정 작가

by 벌레책 2022. 5. 26.

완전한 행복 독후감상 및 줄거리. 정유정 작가

“행복은 덧셈이 아니야. 행복은 뺄셈이야. 완전해질 때까지, 불행의 가능성을 없애가는 거”

  이 문구는 표지에서 소개하는 소설의 대표 구절입니다. 도서관에서 책을 선택할 때, 표지에 쓰인 이 구절이 결정적으로 책을 선택하게 된 계기가 되었을 정도로 위의 문구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처음에는 ‘완전한 행복’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책에 작가가 생각하는 행복에 대한 철학이 녹여져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책을 골랐습니다. 그래서 작가가 생각하는 완전한 행복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소설에 잘 녹아 있는지를 책을 읽기 전의 관전 포인트로 정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책을 읽은 후 이 책이 행복에 관한 책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완전한 행복’은 소설을 이끌어 나가는 주요 제재일 뿐, ‘완전한 행복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답하는 책은 아닙니다.

  책이 기대에 부응하지 않았다고 해서 실망을 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처음에 어떤 기대를 갖고 책을 읽기 시작했는지를 새카맣게 잊을 만큼 강한 몰입감을 선사하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혼자 방에서 책을 읽는 것이 으스스할 정도의 다크한 분위기를 가진 정유정 작가의 ‘완전한 행복’을 읽어볼 것을 권장하면서 리뷰 시작하겠습니다.

**책 프로필
- 출판사: 은행나무
- 출판 연월일: 2021. 7. 28
- 페이지: 522페이지
- 가격: 15,800원

완전한-행복-포스팅-표지
완전한 행복 대표 이미지

 

 

# 줄거리

*스포주의*

 

  수학 교사 은호는 친구 진우와 러시아 여행을 하던 중 매혹적인 여성 유나를 만난다. 은호는 첫 만남부터 유나에게 빠르게 빠져들어 곧 결혼을 결심한다. 은호는 ‘노아’라는 아들이 있었고 유나는 ‘지유’라는 딸이 있었는데, 결혼 후 두 가족이 한 가족이 되는 과정에서 많은 잡음이 발생한다. 이로 인해 유나와의 다툼이 있을 때마다 은호는 유나의 고집과 광기를 본다. 은호는 결국 어머니에게 노아를 당분간 맡기기로 결정한다. 결혼 생활의 다툼의 연속이 될 무렵 시어머니, 유나, 은호가 아들 노아의 거처 문제로 의견 충돌을 보인다. 그날 밤 은호는 유나가 준 차를 마시고 노아 옆에 누워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 잠에 빠진다. 잠에서 깬 순간 은호는 자신의 옆구리 아래에 끼어 있는 것이 인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노아는 천식을 심하게 앓고 있었는데, 은호가 자신의 옆구리 아래 깔려 있는 아들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아들이 숨을 거둔 후였다. 은호는 충격에 빠져 자신을 잃어가면서도 자신이 노아를 죽였다는 사실을 강하게 부인한다. 은호가 사건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들자 유나의 과거가 하나씩 드러나면서 진실이 그 모습을 드리운다.

  유나의 언니 재인은 기자이고, 유나의 전 남편 준영의 오랜 친구이다. 오랜만에 만난 준영은 재인과의 만남을 마지막으로 실종된다. 그 무렵 재인은 은호와 노아 사건으로 인해 유나로부터 철저히 지배되고 있는 딸 지유를 보살펴 주게 된다. 재인은 지유에게 좋은 이모는 아니었지만, 점차 지유에게 가족으로서의 책임감을 갖게 된다. 재인은 지유와 함께 지내는 동안 지유에게 들은 말을 토대로 준영의 실종이 유나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재인이 유나의 주변을 조사하면 할수록 막연한 추측은 점차 확실한 심증이 된다. 결국 재인은 결정적인 증거를 찾기 위해 유나의 시골집에 잠입하게 된다. 유나의 시골집을 조사하던 중 재인은 유나의 살인 도구를 발견하고 그와 동시에 유나에게 발각되어 제압당한다.

  한편 은호는 노아가 죽은 후 유나에게 이혼을 통보한다. 하지만 유나의 마지막 요청에 따라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유나의 시  골집에서 지유와 함께 밥을 먹기로 한다. 유나는 다락방에 납치한 재인을 감금하여 두고, 은호를 죽일 계획을 실행한다. 유나는 은호의 마지막 저녁 밥상을 차린다. 은호는 유나가 음식에 수면제를 탔을 것이라는 강한 의심을 갖지만, 결국 음식을 먹게 되고, 강한 수면욕을 느끼며 쓰러진다. 유나는 약에 취한 은호를 수레에 싣고, 반달 늪으로 향한다. 그때 방에 홀로 있던 어린 딸 지유는 다락방에 감금되어 있는 재인을 발견한다. 재인은 지유의 도움을 받아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유나의 살인을 막기 위해 반달늪으로 뛰쳐나간다.

 

 

 

#1. 완전한 행복

행복한 순간을 하나씩 더해가면, 그 인생은 결국 행복한 거 아닌가

  은호는 유나에게 푹 빠져 그녀와 미래를 약속하려고 한다. 프러포즈를 하는 순간 유나는 은호에게 행복이 무엇인지 묻는다. 은호는 대답은 위의 문구와 같다. 행복은 순간순간의 행복이 더해져 완성되는 것이라는 보편적인 답이다. 하지만 은호의 답은 오답이었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완전한 행복’은 주인공 ‘유나’가 생각하는 행복을 말한다. 책은 완전한 행복이 무엇인지 그래서 어떻게 사는 것이 완전히 행복한 삶인지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다만 유나가 생각하는 행복 철학, 즉 ‘뺄셈의 행복’이 있고, 유나가 이것을 완성하기 위해서 하는 ‘노력’이 책의 스토리를 이끌어 나간다.

인간은 자신의 믿음에 따른 우주를 가진다. 결함도 결핍도 없는 완전성이 아내의 우주였다.
행복은 가족의 무결로부터 출발한다고 믿고 있었다. 이 믿음은 신앙에 가까웠다.

  책을 다 읽고 나서야 비로소 유나가 완전한 행복을 완성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깨달았다. 그 노력은 자신의 딸 지유를 친양자로 입양하는 것과 같이 비교적 정상적인 것도 있는 반면, 자신이 생각하는 완전한 행복에 벗어나는 사람이나 그것을 방해하는 사람을 죽이는 것도 포함된다. 유나가 생각하는 완전한 행복의 그림은 결국 완성되지 않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책의 표지를 보고 유추할 수 있었다. 책의 표지에는 엄마, 아빠, 자녀로 구성된 3인 가족의 그림이 있다. 즉 그녀가 생각하는 완전한 행복은 곧 완전한 가족의 형태로 실현된다. 은호에게는 아들 '노아'가 있지만, 노아는 유나가 생각하는 행복한 그림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다. 유나는 표면적으로 은호의 가족과 조화롭게 새 가정을 꾸리려는 노력을 한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계획 밖에 있는 존재들을 하나씩 ’뺄셈‘해 나감으로써 자신이 생각하는 완전히 행복한 그림을 완성하고자 한다. 유나는 그 계획을 방해하는 존재는 누구든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죽이는 것이 유나가 행복을 위해 해온 ‘노력’이다.

  유나가 생각하는 완전한 행복의 그림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나의 어린 시절을 살펴봐야 한다. 유나는 어린 시절 집안 사정상 가족과 떨어져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지냈다. 어린 유나는 가족의 사정을 헤아릴 만큼 나이가 많지 않았고, 자신이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한다. 설상가상으로 할머니의 집은 교감선생님으로 은퇴한 할머니의 교육 방침에 따라 철저하게 짜인 시간표대로 지내고, 엄격한 규율을 지켜야 하는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어린 유나는 끝없이 길게 느껴지는 시간 동안 가족으로부터 버려진 벌을 받게 된다. 유나는 그곳에 혼자 지내게 된 원인을 찾게 되는데, 그 대상은 자신과 비슷한 입장에 있지만 행복한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 언니 재인이었다. 유나의 입장에서 바라본 세 가족은 아마 행복 그 자체였을 것이다. 유나는 자신과 대비되는 가족의 모습을 보고 행복의 개념을 정립하지는 않았을까?

 

 

#2. 지유

아이들은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란다.

  이 말은 부모가 직접적으로 아이와 놀아주고, 상호작용하는 것 이외의 상황의 중요성을 시사한다. 평소에 부모의 심리상태가 어떤지, 어떤 행동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지를 아이가 보고 있고 그것을 배운다는 뜻이다. 책에서 지유는 늘 ‘그렇게 하도록’ 배운다. 마치 컴퓨터에 입력된 알고리즘과 같다. 지유의 머리에 입력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엄마의 목소리가 새소리처럼 높고 불안하게 떨린다는 것은 ‘지금 너 때문에 짜증이 난다’는 신호이므로 눈치껏 행동해야 한다는 뜻이다.
  • 서지유가 아닌 엄마의 성을 붙여 ‘차지유’라는 익숙하지 않은 이름으로 부를 때는 ‘네’라고 대답해야 한다는 뜻이다.
  • 엄마에게 맞고 난 후 엄마가 ‘괜찮니’라고 물을 때는 적절히 ‘조금요’라고 답한 후에 ‘이제는 괜찮아요’와 같은 말을 덧붙여야 한다.
  • 엄마의 품의 안길 때는 심장이 심술 난 개처럼 컹컹 짖더라도 안심한 표정을 지어야 한다.

  지유와의 관계에서 엄마 유나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직접 말하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답을 지유가 할 때까지 딸에게 공포와 불안을 먹인다. 적절한 대답이 지유의 입에서 나오고서야 엄마의 폭력과 분노가 멈춘다. 이렇게 학습한 것은 다시는 지유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하나의 알고리즘이 탄생한다. 지유는 매 순간 극도의 불안이 자신을 집어삼키지 않도록, 그리고 엄마의 폭력에 노출되지 않도록 최고의 연기를 한다. 책에서는 지유가 강압적으로 학습하게 되는 장면이 생생하게 묘사된다. 그때마다 지유가 느끼는 불안과 공포는 책을 읽는 사람이 방에서 혼자 읽는 것이 무서울 정도로 생생하게 간접 체험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불안과 억압 속에서도 지유는 나름의 자율성을 발휘한다. 되강오리 꿈을 깨기 위해 엄마를 찾는 장면이 이 점을 잘 보여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유는 반달늪에 사는 되강오리가 이상한 소리로 우는 꿈을 자주 꾼다. 그날 밤에도 잠에서 깨어났음에도 되강오리 꿈이 계속된다. 그것이 꿈인지 아닌지는 매번 혼란스럽다. 엄마는 매번 이상한 꿈을 꿨다면서 다 잊어버리라고 하지만, 지유는 다른 꿈과 다른 생생함에 매번 현실과 꿈을 혼동한다. 가끔은 꿈이 깨지 않아 그것이 진짜인지 꿈인지 확인하는 의식을 진행해야 한다. 그 의식은 바로 엄마를 찾는 것이다. 엄마를 찾으려면 방에서 나오지 말라는 엄마의 말을 어겨야 하고, 그때는 어떤 벌을 받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지유는 매번 자신을 공포에 던져 놓더라도 그것을 확인해야 한다. 꿈이 깨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꿈이 깨지 않을 때 엄마를 찾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 꿈이 아님을 알아차릴 수 있다. 엄마가 안 좋은 꿈을 꿨다고 말해주기 때문이다. 결국 지유는 한참을 고민하다 꿈을 깨기 위해 유나의 말을 어기고 방 밖으로 나간다. 깨지 않는 꿈인가 아니면 예측할 수 없는 엄마인가. 둘 중 무언가에 대한 공포가 더 큰지는 모르겠으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두 가지 모두 견딜 수 없을 만큼 큰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유가 무언가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다. 2층 방에서 엄마를 찾아 1층으로 천천히 내려가던 지유는 거실에 피를 흘리는 유나의 모습을 본다. 유나가 걱정된 지유가 “엄마 손에서 피나.”라고 말한 순간, 유나는 즉각적으로 지유가 가장 무서워하는 방법으로 지유를 나무란다. 지유의 머릿속을 공포가 휘저어 놓을 때 지유는 무의식적으로 한 가지를 더 배운다. 엄마가 요구하지 않은 것은 어떠한 것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주도성과 공격성을 갖고 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인데, 이것을 사회적으로 적절한 방법으로 표출하고 표현하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유나는 지유가 주도성을 발휘하는 것을 철저히 억누르지만, 이것은 인간의 본성인 양 강한 압력 속에서도 삐져나오기 마련이다. 지유의 경우에는 주도성이 일종의 공격성으로 표출되는 장면이 나온다.

 

  지유는 자신을 때리다가 떨어진 드라이기 캡을 찾고 있는 유나를 본다. 그리고 자신의 발의 치이는 것이 곧 유나가 찾는 물건임을 인지한다. 지유는 드라이기 캡을 조심스럽게 발로 차서 유나가 찾기 어려운 곳으로 보낸다. 그것은 소심한 복수이지만 지유가 공포와 불안 속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큰 것이다. 그러고는 엄마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발레리나처럼 발끝으로 계단을 디디면서 2층 자기 방으로 간다.

 

  지유의 이런 행동을 보면 유나가 아무리 지유를 세뇌시키고 억압하더라도, 언젠가는 유나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지유가 주도성을 발휘해 행동할 것을 기대하게 만든다. 결국 책의 마지막에 지유는 처음으로 유나의 말과는 반대로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여 결말을 이끌어 낸다.

#3. 나르시시즘과 자존감

  자존감이 사람에게 굉장히 중요하지만, 개인이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해서 그들이 다른 사람과 같이 누구도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유나의 경우에는 우연한 어린 시절의 경험들이 오랜 시간 동안 끊임없이 악순환을 거듭한 것이 유나의 사고방식을 만들어 낸 원인이 되었다. 그 결과 유나는 극한의 반사회성과 ‘텅 빈’ 자아를 갖게 되었다. 동시에 유나는 자신을 극도로 사랑하는 나르시시스트이다. 자신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의 희생이 발생하더라도 그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나르시시스트와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자신을 사랑한다는 점에서 교집합이 있지만, 그 의미가 크게 다르다. 유나처럼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건강한 자존감을 얻을 수 없다면, 자존감은 무엇이란 말인가?

  자존감이란 자아존중감의 줄임말이다. 한자를 그대로 풀이하자면, 높일 존(尊)에 무거울 중(重)을 사용하여 나를 높이고 무겁게(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자존감이 강한 사람이라고 하면, 자신을 높이고 소중하게 생각하여 다른 사람이나 외부 자극으로부터 흔들리지 않는 강직한 사람이 떠오른다. 자존감이 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보았을 때 안정적이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믿음직스러운 분위기를 가진다.

  하지만 작가의 말처럼 언제부턴가 자기애와 자존감의 중요성에 대한 강박이 사회적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SNS나 미디어에서는 자주 노출되는 자존감은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철학적 고민을 수반하지 않는다. 다만 외현적으로 표출되는 행동을 유형화하여 자존감이 높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한다. 심지어는 자아정체성과는 상관없이 ‘자존감이 높은 유형의 행동’을 의도적으로 학습하려는 사회적 경향도 생겨났다. 이와 관련해서 MBTI 성격 검사가 이런 경향을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MBTI에 따른 16가지 성격 유형은 표면적으로 상호보완적이며 각각의 유형은 장단점이 있을 뿐 우열은 없다. 하지만 미디어에서 표현되는 성격 유형의 양상을 보면 유형 간의 우열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인프제(INFJ)나 인팁(INTP) 성격 유형은 소심하고 사회적인 맥락을 읽지 못하며, 자신만의 세계가 강한 사람으로 자주 표현된다. 반면에 엣티제(ESTJ), 엣티비(ESTP), 엣프피(ESFP)는 사교적이고, 호탕한 성격으로 묘사되는 걸로 알 수 있다. 이런 경향성은 특히 유머를 목적으로 하는 콘탠츠에서 더 부각되곤 한다.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경향이 한 사람이 자신의 모습을 사회적으로 선호되는 유형으로 치장하는 것에 기여한다고 생각한다. 높은 자존감에 대한 강박이 외모뿐만 아니라 성격까지 성형하는 사람들을 만들 수 있다.

  사실 자존감과 관련하여 정말 중요한 것은 사람의 행동이 외현적으로 어떻게 표출되는지가 아니라 그 행동이 어떤 내적 과정을 거쳐서 표현되는지가 아닐까 싶다. 가령 우연히 퇴근길에 직장 동료가 내 욕을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을 들었다고 하자. 어떤 사람은 무례한 행동이나 언어로 모욕을 당했을 때, 자신의 내부에 손상을 입지 않도록 심리적으로 강한 방어 자세를 취한다. 그래서 겉으로는 다른 사람들의 험담을 가볍게 튕겨낸 사람으로 보인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유사한 상황에서 부정적인 감정들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며 그것을 내면적으로 조절하는 과정을 통해 험담에 큰 의미를 두지 않기로 결정한다. 이처럼 두 사람은 같은 외부 자극에 비슷한 행동을 보인다. 하지만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외부 자극을 무조건적으로 방어하는 사람보다는 자신을 이해하고 고유한 내면의 일련의 과정을 통해 그것을 긍정적으로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 높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자존감은 사회성과도 꽤 관련이 있는 개념이라는 것을 느꼈다. 나르시시스트와 건강한 자존감을 가진 사람의 차이는 여기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요즘에는, 조금 격하게 표현하자면, 나를 지키기 위해 사회적인 행동을 줄이라는 격언이 참 많이 쏟아지는 것 같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을 해라.’와 같은 문구가 그러하다. 이런 말들을 들으면 자존감은 사회성과 뗄 수 없는 관계처럼 느껴진다. 왜냐하면 사회적 행동은 사회의 요구에 맞게 나의 행동을 조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나의 욕구와 타협하여 사회의 욕구를 맞추는 것을 의미한다. 누군가 ‘사회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나를 조절하는 것이 과연 내 자존감을 위협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조건부로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조건은 사람들이 개인마다 다른 자신과 사회의 경계를 잘 이해하고 있는지와 관련된다. 만약 경계를 훌쩍 넘어서는 사회적 요구를 받고 그것이 개인의 영역을 계속 침범하도록 둔다면 어느 순간 자신이 무너질 수 있다.

  사회적 관계에서 건강한 자존감을 형성하는 것은 마치 눈을 가리고 벽의 생김새를 더듬어서 그 모양을 확인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사회적인 상황에서 내가 얼마만큼 나를 사회에 내어줄 수 있는지를 파악하고 그 수준을 알아나가는 것이 건강한 자존감을 만드는 길이 아닐까?

 

다과와 서재

리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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