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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눈 깜짝할 사이 서른 셋 - 하유지. 독후감. 서평.

by 벌레책 2021. 8. 13.

눈 깜짝할 사이 서른 셋 - 하유지. 독후감. 서평.

  안녕하세요. 오늘은 하유지의 장편소설 '눈 깜짝할 사이 서른 셋'을 읽은 후 독후 감상을 나누려고 합니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난 너라는 문제집을 서른세 해째 풀고 있어.”

 

눈깜짝할 사이 서른 셋 표지

  '눈 깜짝할 사이 서른 셋-난 너라는 문제집을 서른세 해째 풀고 있어.'

  어디서 본듯한 익숙한 표현은 의례적으로 지나치기 마련인데, 흔하디흔한 서른의 이야기를 누군가와 나눠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스쳤다. 서른으로 접어들 무렵, 남들은 다 아는 이야기를 나만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책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 줄거리

  새해 마지막 날까지 야근을 하는 외로운 직장인 영오. 사 년 전 어머니의 죽음에 뒤이어 연락하지 않고 지내던 아버지의 쓸쓸한 죽음을 전해 듣는다. 영오는 직장 동료 외에 그 누구도 곁에 있지 않은 외로운 직장인이다. 아버지가 그녀에게 남긴 것이라곤 그가 늘 보관해오던 돌아가신 어머니의 압력밥솥과 그 속에 낡은 수첩이 전부였다. 낡은 수첩 속에는 마지막으로 딸에게 남긴 눈물 어린 편지 대신 영오에게라는 문구를 포함한 3명의 이름뿐 이었다. 홍강주, 문옥봉, 명보라. 제일 먼저 영오를 찾아온 사람은 기간제 수학 교사 홍강주였다. 영오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편안함을 주는 강주와 함께 나머지 두 명의 행방을 찾아 나선다.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어떤 인연이 있을까?

  한편 영오와 닮은 16살 미지. 그녀는 어떠한 이유로 고등학교 진학을 거부한다. 겉보기에는 어른들에게 싹싹하고 밝지만, 동시에 아픈 결핍을 지닌 소녀이다. 미지는 자신의 길과 정체성을 찾기 위해 또래 대신 자신이 원하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삶을 실천한다. 결핍이 있는 사람을 따듯하게 덮어주는 미지는 가족과의 갈등과 자신의 결핍을 딛고 진정한 자신을 찾을 수 있을것인가.

 

  이 책은 마치 드라마 ‘멜로가 체질’처럼 전반적인 스토리보다 인물 한 명 한 명이 애뜻한 소설이라고 느껴진다. 우리는 실제 존재하지 않는 소설 속에 인물에 깊이 공감하곤 한다. 그 이유는 소설이 허구의 이야기임과 동시에 현실을 또렷하게 고증한다는 것을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느끼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한 명씩 등장인물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소설을 읽는 재미가 컸기에, 인물을 중심으로 글을 진행해보겠다.

#. 오영오

엄마가 아플 때 넌 나에게 물었어. 점점 나빠지기만 하는 엄마를 언제쯤 포기해야 할까?

그 시절 어떤 남자가 다가왔을 때, 넌 나에게 물었어.
지금 나에게 연애란 비싸기만 한 케이크처럼 불필요하다고 어떻게 설명하지?

엄마가 떠났을 때, 넌 나에게 물었어.
이제 엄마가 돌아올 리 없는 집에서 나가고 싶겠지. 그럼 아버지는 다시 한번 혼자가 될 텐데 상관없니?

아버지의 생일이 왔을 때, 넌 나에게 물었어.
 영혼 없는 문자라도 보낼래, 아니면 가식은 집어치울래?

나는 더듬더듬 답하지.
내가 진땀을 흘리며 내놓은 답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넌 알려주지 않아.
인생에는 답이 없다고만 변명하지.

  눈 깜짝할 사이 서른 셋이 된 그녀에게 과연 삶의 동력이 있을까? 영오의 삶을 지탱하는 힘은 무엇일까? 강한 의지일까 타성일까. 아니면 변화를 비껴가게 하는 두려움일까. 빛 한 줄 보이지 않는 영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내내 든 생각이다. 영오를 보고 있자면 폐 아랫부분 1/3 정도에 물이 찬 것 같다. 숨을 들이켜면 폐는 물을 스펀지처럼 흡수하고, 내쉬면 폐는 물을 뱉어 내는 듯한 기분이다. 책의 초반부, 책의 전개와 내용의 통일성이 무너지는 것을 무릅쓰더라도 영오의 곁에 좋은 사람이, 좋은 일이 생기길 기대하면서 읽었다.

영오는 엄마의 흡연을 아버지가 아는지 모르는지 몰랐다. 자기는 안다는 사실만 알뿐이었다.
알면서도 고함을 치고 악을 썼다. 그러다가 침묵했고, 외면했다.

  폐암으로 돌아가신 엄마, 오랫동안 담배를 피우던 아버지. 영오는 이 전형적인 이야기에서 오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을까? 엄마의 흡연을 알고 있음에도 그녀는 단지 속 깊은 곳에서부터 타고 있는 슬픔과 화를 필사적으로 끄려고 노력했다. 맹목적인 노력은 또렷한 사실을 외면하게 했고, 그 결과 영오는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퍼부어버린 것은 아닐까?

인생에는 답이 없다. 그 대신 사람들이 있다. 나의 0,5, 내 절반의 사람들이.

  영오는 달콤한 결론을 낸다. 하지만 그 결론의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달콤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이 있었고, 처리해야 하는 업무와 일상의 반복이 있었다. 그럼에도 한 사람 한 사람, 영오의 곁에는 다시 좋은 사람이 그 공간을 채웠다. 변화를 시도하는 작고 용감한 선택이 삶의 방향을 조금씩 비틀었다. 모든 일이 그렇지는 않지만, ‘인생은 계단이다라는 말에 동의한다. 어떤 사람과의 인연, 순간의 선택이 삶을 급격하게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언젠가는 자신을 괴롭히던 것 위에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 오호석(아버지)

아버지는 죽고 나서야 나를 호명했다. ‘영오에게’라면서. 아버지는 영오가 누구인지 알고나 불렀을까?
아버지 저 아세요? 전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데요? 너무 섭섭해하지는 마시고요.

  외로운 딸의 외로운 아버지. 폐암으로 죽은 아내의 남편이고, 흡연자이다. 유언장에서도 유구무언이었다. 그는 다양한 감정과 생각에 휩쓸리다 결국 죽으면서 딸에게 남길 만한 말을 찾았다. 4글자 영오에게였다. 평생 얼마나 많은 말을 속으로 먹으며 살아왔을까? 그 외로움의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워 위로조차 힘든 인물이다. 그는 아내가 흡연을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분명한 건 영오는 그 사실을 알았다. 왜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을까 하고 영오를 탓해본다. 아버지는 스스로 모든 죄책감을 짊어지고 외로움을 선택했다. 어떤 해명도 그럴싸한 변명도 하지 않는다. 묵직한 죄책감이 윗입술을 짓누르고 있었던 것일까?

“살게요. 그냥 살게요. 오늘 하루, 내일 하루, 운 좋게 모래가 오면 또 하루 더.....”

  영오가 아버지에게 남긴 말이다.

  아버지가 선택한 것은 차곡차곡 돈을 벌어 유산을 물려주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딸에게 외로움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수첩에 적은 사람들을 통해 외로운 딸을 위로하고, 딸의 앞날을 응원하는 것을 선택했다. 호석 본인에게 그리고 영오에게 돈이 중요했던 적은 없었다. 사람과 삶만이 중요했다.

#. 미지

공포가 미지를 덮쳤다. 가위눌림이나 악몽과도 같은 두려움, 언제 올지도 모르고 막지도 못하는 공포. 가끔 그런 순간이 찾아왔다.

  얼핏보기에 눈 깜짝할 사이 서를 셋과는 거리가 먼 밝고 당당한 매력을 갖은 17세 소녀. 갑자기 덮치는 공황과 환각, 결핍을 가진 소녀. 그녀의 성품이라면 이마저도 덤덤하게 직면하고 대처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오히려 구멍 나고 결핍이 있는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보고 사랑할 줄 하는 사람이다. 미지는 찢어진 옷이라도 추운 사람을 따듯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소설 내내 톡톡튀는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곤 했다.

  “ 난 이제 알지도 못하는 애들하고 일 년씩 이 년씩 묶여 지내지 않을 거야. 친구 없는 걸 불편해하는 척하면서 나하고만 친해지는 짓, 그만둘래. 내 맘에 드는 사람들하고 친해지고 싶어 난 그 사람들을 네모 말고 동그라미 속에서 찾을 거야. 엄마도 알지? 교실은 네모나고 지구는 둥글다는 거.”

  미지의 생각은 어린 생각이다. 그저 어린 사람에게서 나오는 생각. 어린 생각이라고 다 미숙한 결과를 낳지는 않는다. 무엇이 좋은 선택이고 판단인지는 현재로서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다만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나이가 비슷한 친구를 갖지 못할 때 사람들은 우정의 결핍을 겪게 될까? 내가 미지라면, 또래 친구가 없는 관계에 대해 정상성에 대한 의문과 문제의식을 끊임없이 느낄 것 같다. 보편적으로 사람들은 자신과 유사한 사람과 관계를 형성하기 쉽다. 미지가 또래에게서 자신이 추구하는 우정의 가치를 찾지 못한다면, 친구가 꼭 또래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연령대만 갖게 되는 고민과 인생의 굴곡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를 한 명쯤 미지의 옆에 놓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 문옥봉

옥봉은 돋보기를 쓰더니 봉투를 열었다. “별걸 다 챙겨왔네.” 글씨 교본과 만년필, 잉크를 만지고 살피며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어린아이처럼 눈을 빛낸다. 어깨를 움츠리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킥킥 웃기까지.

  낡은 간판을 걸고 숨은 맛집 '문옥봉 김밥집'을 운영하는 문옥봉. 그녀는 기다리고 여유롭다. 한 발짝 뒤에서 자신과 주변을 둘러보며 인생을 통달한 것 같은 그녀가 보여주는 설렘은 핑크빛이다. 노년에 발견하는 새로움 또는 노년의 도전을 관찰할 때 느껴지는 특이한 기분이 있다. 마치 초등학생 시절 학습지와 가정통신문으로 나눠주던 회색 종이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어떤 낡은 기억이 빛을 발할 때 느끼는 아름다움과 많이 닮아있다.

#. 마무리

“상처 없는 사람 없어. 여기 다치고 저기 파이고 죽을 때까지 죄다 흉터야. 같은 데 다쳤다고 한 곡절에 한마음이냐, 그건 또 아닌지만 같은 자리 아파본 사람끼리는 아 하면 아 하지 어하진 않아.”

  책에는 10대 미지부터 죽음을 앞두고 있는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아픔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것을 관조한다. 그럼으로써 어떤 사람의 아픔에 무게를 실어주지 않는다. 오랜 삶에 파인 상처가 깊고 흉터가 진할까? 상처는 상처고 남는 흉터는 흉터다. 상처는 사람을 가지리 않는다.

  누군가는 자신이 자신의 상처를 적극 보살핀다. 누군가는 옆에서 나의 상처를 적극적으로 보살펴 줄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외면하고 방치한다. 누구나 자신의 상처를 안고 있다. 그것이 깊든지 얕든지 간에.

다과와서재

리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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